이렇게 창업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아르고 0 5094


(펌)

- 이 글은 정대헌 회원이 중소기업청과 한국경제신문이 주최한 제2회 창업성공 및 실패수기 공모전에서 실패부문 노력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


‘두드리고 또 두르리며 건넜더라면…’

-이렇게 창업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프롤로그

2년여 간의 창업과 실패.

젊은 시절에 후회 없는 모험이라지만, ‘올인 후 실패’에 대한 책임은
너무 가혹했다.

그후 2년여 세월동안 오직 ‘발등의 불’을 끄고 나니까, 꼭 사업했던
기간만큼의 세월이 지나버렸다. 이제 몸 추슬러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 되었는지 찬찬히 따져봐야 할 때다.

인터넷 여론사이트 옴부즈닷컴(www.ombuz.com)은, 7개월을 준비해
10개월의 개발기간을 거쳐 한때 인터넷뉴스 분야에서 5위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7개월 동안만 세상에 선보이다 사라진 미완의 사이트였다…

지난 흔적들을 더듬으려니 뼈저린 아픔이 함께 묻어나온다.

그 눈물로 성장한 딸은 세살이 되어, 어느새 아빠의 고단한 어깨를
주무르고 있다.


신혼의 단꿈, 그보다 더 컸던 ‘벤처의 꿈’


우리 부부는 대학 1학년때 만난 같은 과 커플이다.

오랜 연애 끝에 2000년 4월 결혼하여 부모님이 마련해주신 돈을 가지고
서울시 동작구에 전셋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꾸렸다.

나는 당시 작은 법인의 기획실에 근무 중이었는데, 인터넷으로 자료를
찾던 중 좋은 사업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때는 ‘벤처열풍’이 한창이었고, ‘아이러브스쿨’은 날마다 대박을 터뜨리며
신화를 만들어가던 분위기라 많은 청년들이 ‘벤처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

나는 밤낮 안 가리고 사업 아이디어를 구체화시켜 재직 중이던 회사의
공동대표이자 투자자였던 분을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사업계획서를 보시더니 뜻밖에도 ‘아이디어가 좋다’며 적극 지원을
약속해 천군만마를 얻은 심정으로 회사를 떠났다.

나에게 이보다 좋은 ‘앤젤’이 어디에 또 있으랴?

컨설팅업체를 찾아가 투자자와 함께 사업성 평가를 듣던 날, 열흘 동안
분석했다던 컨설턴트는 ‘아이디어는 기발하지만 내가 성공할 확률은
2%’라고 예측하였다.

그것은 그만큼 벤처에서 살아남기가 어렵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지만,
사업경험이 없고 관련분야 비전문인인 내가 창업자로서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오기가 생긴 나는 보란 듯이 ‘그 2%’ 안에 내 이름을 올리겠다고 열정을
달궜으나, 투자자는 더욱 신중해졌다.


어차피 맨발로 뛰어들었기에 나는 하나씩 풀어나갈 생각으로
서울산업진흥재단에서 주관하는 ‘벤처기업 창업경영 실무과정’을
수강하며 준비해야 할 것들을 꼼꼼히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벤처의 거품으로 인하여 기존 투자자금도 줄줄이
빠져나가고 있다’는 보도기사가 계속 쏟아졌고, 나의 앤젤은
‘소나기가 내릴 때는 일단 피하고 보자’며 유보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제서야 내가 탔던 열차가 ‘종착역이 없는 막차’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만, 나는 이미 기관사 자리에 앉아 ‘미지의 종착역’을 향해 열차를
몰고 있었다.




‘전세보증금’ 빼서 회사를 설립하다


나에게는 ‘남산’이라도 옮길만한 배짱과 열정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를 차릴 만큼 돈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사업을 안할 거면 모르지만 기왕에 시작할 것이라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큰 손실이라고 생각했다.
언제까지 투자자의 얼어붙은 지갑이 열리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기에
점점 조급해져 갔다.

어느날 아내에게, 살던 집을 월세로 옮기고 전세보증금을 빼서 일단
시작부터 하자고 제안 했더니 펄쩍 뛰었다.
나는 ‘조만간 벤처기업의 거품이 빠지면 제2의 벤처바람이 불어올 것이고,
사업이 구체화되고 나면 투자자도 돈다발 들고 찾아오게 되어 있다’고
말하며 달래보았다.

발을 동동 구르던 내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내가 내 손을 잡아주기까지
많은 고심을 했음이 분명했다.
10년지기 아내의 믿음을 바탕으로 그렇게 사무실과 이사갈 집을 동시에
알아보러 다니며 본격적인 창업 준비를 시작했다.

보라매공원 후문쪽에 위치한 벤처타운에 10평짜리 사무실을 얻을 수
있었으며, 정원이 넓은 주택의 별채에 세 들어 살기로 하였다.

그리고 자본금 5천만원을 납입하고 법인 등기를 낸 후 2001년 5월
사업자등록증을 받는 과정까지 신속하게 진행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인터넷여론 전문회사 ‘옴부즈닷컴(주)’이라는
기업은 그렇게 월세방으로 옮기면서야 탄생할 수 있었다.



4명의 직원 뽑아 개발을 시작하다

나는 공식적으로 창업을 하기 몇달 전부터 소호센터에 작은 사무실을 얻고
물밑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지인의 소개로 리서치전문가 1명을 만나게 되었는데,
온라인 리서치 시장의 잠재력을 파악하고 있던 그는 안정된 회사의
선임연구원 자리를 그만두고 기꺼이 내가 몰고가는 열차에 올라탔다.

여론분야의 사업을 시작하면서 아무 것도 모르던 내게 그의 합류는
더없이 든든한 힘이 되었고 창업 준비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

우리는 시장조사를 하면서 실제적인 사업계획서와 사이트 개발 기획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무실을 벤처타운으로 옮긴 후 소수정예의 창업멤버를 구성하기로 하고,
추가로 웹프로그래머 1명, 웹디자이너 1명, 플래쉬 애니메이터 1명 등
모두 3명을 뽑아, 5명의 식구가 되었다.

이들에게 내가 하고자 하는 사업내용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인터넷 공간에 옴부즈닷컴(www.ombuz.com)이라는 여론포탈 사이트를
만들어 대한민국 최고의 여론정보 회사가 되고자 한다.

옴부즈닷컴 사이트에는 사용자 중심의 특화된 게시판 서비스를 마련해주고, 여론흐름에 민감한 정보수요자에게는 필요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도록
맞춤형 게시판으로 보여줄 것이다.

또한 매주 촌철살인의 ‘플래쉬만평’을 제작해 인터넷으로 전파함으로써
옴부즈닷컴을 감각적으로 알려나갈 것이다.

이런 여론브랜드를 바탕으로 온라인 리서치 시장에 진입하면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이 사업의 성패는 후발주자가 나타나기 전에 얼마나 빨리 여론정보
시장을 선점하느냐에 달려있다”

마법사의 주문과 같은 이 계획에 직원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모두들 정말 그렇게 될 것으로 믿었고 각자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 하자며
뜨겁게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작은 회사지만 열심히 일 해서 유명한 회사로 키워
창업멤버로서의 보람을 누리자’는 결의가 나올 때에는, 나는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것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벤처사장’이 되어 있었다.




순조롭게 시작하는 사이트 개발


개발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너무 열심히 하느라 좁은 사무실은 더욱
뜨거워졌고, 그럴 때면 돗자리를 들고서 보라매공원으로 나가
김밥을 먹고 배드민턴도 치며 열기를 식히고 돌아와 또 일했다.

내가 그려준 큰 그림에 서로 머리를 맞대 회의를 하면서 구체적인 살을
붙이고 한쪽에서는 색을 칠해 나가고 있었다.


나는 우리의 개발 일정이 차질을 빚지 않도록 자금을 만들어야 했다.
서울시로부터 중소기업육성자금 지원업체로 선정돼 5천만원을
배정받았으므로 담보만 확보하면 되는데 나에게는 제공할 담보가 없었다.


그래서 신용보증 업무를 취급하는 금융기관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상담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출액이 없는 창업초기의 상태였기에 누구도 선뜻 보증서 발급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뛰어다니는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져 갔다.


그러나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사이트를 보면서, 늦은 밤까지 때로는
집에도 못 가고 애쓰는 직원들을 보며 나는 용기를 다지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자금이 막히다


또다시 찾아간 서울신용보증재단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일정 조건을 갖추고 난 다음에 서류를 접수해 보자는 것이었다.

모든 게 뜻대로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런데 사이트의 윤곽이 드러나면서 점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잘 모르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내가 그려준 큰 그림에서
조금씩 빗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차이는
커져만 갔다.

개발팀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컨셉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었다.
회의는 길어지고 나는 다시 백지 위에 새로이 그림을 그려줬다.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냈지만 우리는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한편, 자금난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 돈 걱정 안하고 개발에만
전념하고 싶던 나는, 조건을 갖춘 뒤에 서울신용보증재단에 제출해야
할 서류를 하나씩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보증심사 서류에는 금융거래확인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거래은행에서
그것을 발급해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최근에 연체기록이 있는데, 그 기록을 담아 발급해봤자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알아봤더니 부모님이 내 명의로 대출받아 납부하고 있던 것의 이자가
실제로 늦게 납부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또다시 3개월을 기다리란 말인가?



고비용구조 ․ 자금난…끝내 구조조정 단행


순탄하던 개발과정과 자금조달이 벽에 부딪히면서 회사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한달에 7-800만원이 지출되는 고비용 구조였기에, 이대로 가다가는
세상에 얼굴 한번 내밀지도 못하고 주저 않게 생겼다.


살다보면 암초에 부딪힐 때도 있는 것인데, 나는 이럴 때 장렬히 좌초할
것도 아니면서 왜 대안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창업초기부터 자금이 부족했던 나는 자금조달문제 만큼은 마땅한 대안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고, 그것은 끝나는 날까지 내 발목을 붙들고
늘어졌다.

나는 또 부랴부랴 생존의 방법을 찾게 되었다.

뒤늦게 내부적으로 경비절감 방법을 찾으면서 나는 인력 선택과
투입시점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플래쉬 애니메이터의 경우 그가 가지고 있는 뛰어난 창의력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상대적으로 프로그램에는 서툴러
플래쉬를 잘 다루지 못했다. 3개월 동안 준비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있어 상품화가 힘들다고 보았다.

또한 리서치 전문가의 경우에도 어찌보면 ‘가게가 문을 열지 못하고
장비도 들여오지 않은 상황’에서 일찌감치 장비운용 기술자부터
데려다놓은 셈이 되었다.

그래서 구조조정을 하기로 결심했다.


창업멤버이자 6개월 동안 든든한 동반자였던 리서치 전문가, 더구나 그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나를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이 아니던가?
그와 함께 보라매공원의 잔디밭에 앉아 낮술을 마시며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렇게 한다고 고통이 풀어질 수는 없었지만, 나는 넥타이에 구두를 신고
운동장을 몇 바퀴째 돌고 돌았다.

창업자의 잘못된 의사결정은 직원들의 생계를 순식간에 빼앗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무거운 책임의식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어깨를 짓누를 것이다.


그렇게 직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리서치 전문가와 플래쉬 애니메이터를
내보내던 8월말, 나는 심하게 약해져 있었고 남아있는 개발팀 직원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

맞벌이로 직장에 다니고 있던 아내가 임신한 것도 이 시기였다.




기대치 밑도는 개발수준, 사이트는 표류하고


그래도 다시 9월이 시작되면서 한층 속도를 내고자 했다.
우선 회사의 몸집이 가벼워졌고 기획업무를 내가 직접 주관하면
더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내 컨셉을 공유하고 있지 못했던 개발팀은 자꾸 다른 방향으로
빠졌는데, 나는 그것을 설득시켜 되돌려 놓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이
하는대로 따라 주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이상한 그림이 되고 있었지만, 자금도 없는데다
자꾸 시간이 늦어지니까 그냥 이상한 그림인 채로 흘러가기만 했다.


짧지 않은 시간에 많은 개발비용을 투자했는데도,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우선 ‘기획’이 잘못 되어서 그렇다.

그러니 꼭 개발팀만 탓할 일은 아니지만,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찾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개발팀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이트 개발은 시간이 흐를수록 표류하고 있었고, 그러는 중에도 나는
소액대출을 받아 직원들의 월급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기다릴 여력이 없어 기술신용보증기금에 대출보증 신청서류를
접수했다.



“사장님, 언제까지 수정만 하고 계실 건데요?”


함께 고생했던 창업멤버를 한순간에 떠나보내는 것을 보고
개발팀 직원들도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개발과정에서
실컷 개발해 놓으면 손사레 치며 다시 그림을 그려주는 사장의 모습이
반복되니 어찌 답답하지 않았겠는가?

처음 그들이 입사하면서 가지고 있던 꿈과 희망은 멀리 떠나있는 것 같았고,
 나 혼자 들떠 비전을 제시해도 점점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아이템들이 인터넷의 다른 사이트를
통해 상용화되는 것이 목격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이디어 유출이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필요에 의해
창조되어가는 과정이었다.


누군가 디지털 시대는 ‘시간싸움’이라고 했던가? 더 늦기 전에 시장에
진입해야 한다고 초조해 하면서 나는 비즈니스 모델을 정리해서
특허 출원하기로 마음 먹었다.

조만간 방문 예정인 기술신용보증기금의 심사팀에게 가산점을 얻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나 스스로가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사업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당시 개발 중인 사이트를 가지고 시장에서 승리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내가 불만족스러워 한다는 것을 직원들도 알았던 것일까?


또다시 내가 컨셉과 다르게 개발된 것을 보고 지적하자 직원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사장님, 언제까지 수정만 하고 계실 건데요?”



그것은 고치고 또 고치는 작업이 곤욕스러워서가 아니다.
돈도 없어 직원들도 쫓아내는 상황에 밑도끝도 없이 수정만 하고 있는
사장의 모습이 안타까워서 그랬을 것이다.


프로그래머가 그만 두겠다고 한다. 그것은 다른 개발자가 와서
인수인계 받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그동안 진행했던 모든 작업들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극구 만류하는데, 이번에는 디자이너도 함께 그만 두겠단다.


창업자로서 내 역량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며 나는 다시 혼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차라리 잘된 일인 지도 모른다. 새 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을 하며 전화위복으로 삼고자 했다.




“여보,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그렇게 믿고 동고동락했던 직원들이 모두 떠나는 상황이 벌어지니까
아내가 제일 가슴 아파했다.


지치고 꺾인 내 어깨를 쓸어내리면서 아내는 조심스럽게 ‘이제 그만 두자’
고 설득해본다.

‘프로그래머도 나가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떠나야
사장님이 그만 둘 것 같아서 그렇게 했다’고 전하는 것이었다.


1년 넘게 날아보려고 발버둥치며 노력했지만 나는 날아보지도 못하고
고작 제자리에 추락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내가 부족한 탓이며 준비 없이 무리하게 추진한 것이
원인이라고 가슴을 쳤다.


우리 사무실이 있는 건물 지하에는 사우나가 있었다.
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이곳에 가서 물 속에다 많은 고민을 함께
풀어놓는다. 그러면 복잡한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지곤 했다.


모두 떠나고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았을 때, 다른 회사의 개발자로 있던
친구가 밤마다 찾아와 나를 위로해 주었다.
이 분야에서는 처음부터 고민을 나누던 유일한 친구였다.


이제 남은 방법은 여기서 사업을 정리하든가, 아니면 새로 사람을 뽑아
처음부터 다시 개발하든가, 둘 중 하나였다.


친구는 내 자금여력과 향후 자금확보 방안에 대해 물어왔다. 나는 있는
그대로 현재 남아있는 자금은 없으며 앞으로 융통 가능한 자금의 액수와
조만간 기술신용보증기금으로부터 5천만원의 대출을 받기 위해
보증신청을 해둔 상태라고 말했다.


다시 친구는 “꼭 해야 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다. 어떻게 준비한 사업인데…”라고 답하였다.


공교롭게도 그때 사무실로 특허출원서가 도착했다. (게시판의 맞춤페이지 구성을 이용한 실시간 광고방법 및 시스템, 출원번호 2002-67252)


우리는 두 번째 방법으로 새로운 사람을 뽑아 다시 개발을 시작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힘들겠지만 시행착오를 밑천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면
2개월 후에는 사이트 오픈이 가능할 것 보았다.


기운 없이 며칠을 보내던 내가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임신 5개월이던 아내는 그렇게 만류하던 태도를 바꿔 어디에서 구해 왔는지
내 손에 500만원을 꼭 쥐어 주었다.



부러진 날개로 다시 날개짓 하다


나는 곧바로 구인구직 사이트에 채용공고를 냈고 많은 지원자 중에서
친구의 도움을 받아 최적의 인원을 선발했다.


웹기획자 1인과 웹프로그래머 1인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고, 웹디자이너는
임시직으로 고용했다.


한번 부러진 날개로 이제는 더 이상 실수하지 않으리라는 굳은 각오를 하며
다시 비상을 향한 날개짓을 시작한 것이다.


새 직원들이 출근하면서 다시 열정을 쏟기 시작했고, 서로 머리를 맞대
최상의 기획안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으므로 하루에도 몇 번씩 회의하고 자료찾고 개발하고
또 회의하는 과정이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그러던 중 아직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기술신용보증기금에서 보증심사를 나온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프리젠테이션을 하고 비전을 보여주었지만,
심사팀은 갑작스런 핵심기술 인력의 교체는 ‘회사가 불안정한 상태’라며
좋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그 당시 유일한 자금확보 방안이 무너지고 말았으므로,
이제 나는 진짜 빚 내서 개발을 진행해 나갈 수 밖에 없었다.
한없이 막막했다.


돈줄이 꽉 막혀 낙심하고 있는 나에게 새로 들어온 직원들은
‘월급 안 줘도 일 할 테니 용기를 내라’며 오히려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런 마음으로 함께 해준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옴부즈닷컴, 드디어 세상에 문을 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밤낮 가리지 않고 정말 열심히 했다. 그렇게 하기를 두달여,
약간 늦었지만 2002년 1월말에 시범 서비스를 오픈할 수 있었다.
그날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아무 것도 없던 사이트에 하나씩 컨텐츠가 채워지고 그것들은 각각의
생명력을 가지며 필요한 정보수요자에게 제공되기 시작했다.
아직 어설프고 완벽하지 않았지만, 오류를 잡고 보완하면서 점점
여론컨텐츠가 모이는 사이트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랜드 오픈을 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눈에 보였다.


순위사이트에서 5-10위권으로 수직상승하다

우리는 유저 인터페이스를 전면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추가 개발을 하기로 했다. 다시 채용공고를 내고 웹디자이너 1인과
인터넷신문 편집기자 1인을 더 채용했다.


이번에는 일간지에서 보도하는 여론조사 기사를 체계적으로 DB화하고,
동일한 리서치보고서에 대한 매체별 보도방식을 비교분석하는
자체기사를 생산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준비하며 4월말에 2차 개발을 완료했고, 그때부터 홍보 마케팅도
확대해 나갔다.

아내는 그 시기에 딸을 출산하였는데 생명의 탄생은 좋은 소식을 함께
가지고 왔다.


방문자와 가입회원이 늘기 시작했고, 컨텐츠가 쌓이면서 고정 방문자
수도 늘어났다. 여론에 민감한 주요타깃 관계자들이 속속 우리 사이트에
들어와 정보를 검색하고 있었다.


웹사이트 순위평가 사이트인 100HOT과 랭키닷컴에서 ‘옴부즈닷컴’은
수직상승하며 인터넷신문 분야 5-10위권에 진입하고 있었다.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지만 모든 것에서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가능성’일 뿐, 결정적으로 가시적인 수익모델이
나오지 못했다. 수익이 나기 위해서는 더 시간이 필요했다.


유망한 인터넷 기업들도 수익모델을 찾지 못해 줄줄이 문 닫고 떠나가는
이 전쟁터 한복판을 건너 오면서도 나는 왜 수익모델 만드는 데에
실패하고 만 것일까?



어디 ‘돈’ 좀 없어요?


아, 너무 목이 말랐다.

1년반을 돌아서 여기까지 왔건만, 이제 겨우 해볼만한 상황인데 나에게는
돈이 너무 없었다. 기존의 대출들도 단기 연체가 시작되었고
더 이상 빌릴 곳도 없었다. 수익도 없이 빚에 쪼들리는 회사에 누구도
정책자금 보증서를 발급해 주지는 않을 것이었다.


당장 긴급한 수혈이 필요하였기에 나는 알고 있는 모든 투자자들을
만나러 다녔고, 무턱대고 선배들을 찾아 나서기도 했지만 결국 아무
도움도 받을 수가 없었다. 누구도 인터넷 기업에 투자하려고 하지
않으려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다시 월급날은 돌아왔고, 나는 명동 사채시장에 가서 법인카드로
고리의 이자를 떼고 돈을 만들어왔다. 이제 터지는 것은 시간 문제,
한두달이나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준비를 해야 했다. 옴부즈닷컴을 살리고
이 직원들이 계속 근무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라도 찾아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절박해져 갔다.


어느 일요일, 사회에서 인연을 맺어 친하게 지내던 형님의 가족과 함께
성산동 성당에서 주일미사를 드리던 날, 성체를 모시면서 얼마나
펑펑 눈물을 쏟아놓았는지, 너무도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제발 옴부즈닷컴을 문 닫지 않게 도와 주세요…’



막다른 길에 서서, 회사를 정리하다


7월이 되면서 금융기관의 독촉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직원들에게는 애써 태연한 척 하지만 나는 점점 궁지로 몰리고 있었다.


어찌보면 돈 한푼없이 여기까지 끌고온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나에게 6개월만 더 시간이 허락한다면, 누구라도 옴부즈닷컴을 인수해서
계속 사이트를 운영할 수만 있게 된다면…

그러나,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시간도 끝나고 말았다.


딸의 100일 잔칫날, 지방에서 부모님이 올라오시고 친지들이 모여
축하하고 기뻐하는 자리였지만, 내 어깨는 한없이 버겁기만 했다.

젖내 나는 딸을 부둥켜 안으면서 ‘이제 서서히 정리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데 딸이 대신 울어준다.
아내는 말없이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남아있는 직원들에게 회사를 정리하겠다고 말하고 침통한 분위기에서
향후 옴부즈닷컴의 진로에 대한 대책없는 회의를 하였다.
이제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동안 옴부즈닷컴(주)에서 근무한 모든 직원들에게 부족한 사업가로서
무한한 책임감을 가슴에 안고, 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떠나야 했다.


아내와 100일된 딸을 남겨두고 고향으로 혼자 내려오던 밤, 난데 없는
생이별 앞에서 우리 부부는 더 이상 침착할 수가 없었다.
어둠이 내린 단칸방에는 몇시간째 눈물이 그치지 않았고 영문도 모르는
우리 딸아이도 덩달아 함께 울었다.

나는 그날 밤의 아픔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갈 것이다.



그후 2년동안 ‘사랑하며 살아가기’


혼자 남아있던 아내는 다니던 회사를 퇴직하고 1달 후에 이사짐 트럭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왔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이 지역에서만 벌써 세 번째 집이다.


사업을 정리한 다음 나는 지방에서 조경사업을 하시는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 현장 일을 3년째 하고 있다. 차라리 몸이 으스러지도록 노동을 하는
게 훨씬 편했다.


따지고 보니까 실제 사업을 했던 2년의 세월동안 모두 1억5천만원 정도의
돈이 투자되었다. 그중 1억원 정도는 고스란히 아내와 내 빚으로 남았는데,
우리는 다행히 사채는 이용하지 않고 은행권과 여신금융권에서만
자금을 조달했으므로 열심히 일하면서 하나씩 갚아나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 시점은 정부에서 개인신용 정책을 새롭게 적용하던 때라
금융기관들은 강도 높게 연체관리를 했으며 신용카드사들은 일시에
한도를 축소했다. 나는 부채상환 계획을 세울 겨를도 없이 여기막고
저기막고 또 터지는 것을 막아나갔지만 신용불량자를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내는 딸을 놀이방에 맡기면서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나도 제한된
수입으로는 버틸 수 없었기에 낮에는 몸으로 일하고 밤에는 부업으로
대리운전 기사를 하며 치열하게 살아갔다.


단돈 5만원이 없어 딸아이 분유값, 기저귀값에 발을 동동 구르던 때에도,
조경일 끝내고 곧바로 대리운전 일하러 가서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돌아와서
도 불면증으로 시달리던 때에도, 하루 수십여통의 카드사 빚 독촉에
시달리던 때에도, 나는 아내의 말을 떠올리며 힘을 얻곤 했다.


“아무도 우리 신랑 뭐라고 하지 마세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제대로
다리 뻗고 잠 한숨 못자며 피울음 흘린 사람이란 말이예요!”

그렇게 2년 가까이 몸부림치며 살아온 끝에 신용회복위원회로부터
개인워크아웃 승인을 받아 급한 불이 꺼지고 서서히 생활에 안정이
찾아오고 있다.


결혼 후 신혼단맛도 모른 채 여기까지 뒷바라지 해준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은, 내 인생의 ‘귀인’이기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에필로그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던가, 나는 그 말처럼 ‘값진 고생’을
사서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종착역 없는 열차’를 마음대로 운전하다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차에서 내렸다. 처음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는 길은
훨씬 험난했다. 나처럼 쓸쓸히 돌아오던 사람들 중에는 영영 제자리로
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가혹한 세월을 보내면서 내가 발등 찍으며 후회하고 또 후회했던 것은,
‘창업’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부딪쳐야 했던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의사결정권자인
내가 내렸던, 최선이 아닌 때로는 ‘차차선의 선택’들이 쌓이면서
스스로 함정을 파고 빙둘러 가야 했기에, 내가 내렸던 ‘잘못된 결정’들을
일일이 후회하고 있었다.


한번 단추를 잘못 채웠더니 그 다음부터는 아무리 제대로 채우려 해도
이미 내 손에 있는 것은 ‘최선의 단추’가 아니었다.


그럴 때는 잘못된 지점을 찾아 새로 채워야 할 필요가 생기게 되는데,
창업자는 ‘그 때’를 놓치면 안 된다.


그 때를 지나 너무 멀리 가 버리면 ‘풀고 새로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지 않게 되며, 거기서 더 진행해 버리면 ‘단추 채우는 일’ 마저
멈춰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는 모든 미련 버리고
털어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도 배우게 되었다.

나는 2년 동안 내 마음대로 사업을 하였고, 다시 2년 동안 내 행동에 대한
무한책임을 지며 고난의 세월을 살았다. 지금 내가 깨우치고 있는 교훈들은
2년 전 사업을 접을 시점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창업 실패 후 나는 깊은 통찰과 인내의 시간을 가지며 비로소 인생의
소중한 자산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창업하기 전에 이 교훈을 나누어 성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 창업 실패요인에 대한 자기분석 -


<기업가 측면>



1. 전쟁터에 나와서야 무기를 찾아 헤매다


창업을 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반년 넘게 꼼꼼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전쟁터에 나와 보니 내 손에는 쓸모 있는 무기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승전'에 대한 막연한 확신만 가지고서 불 뿜는 전쟁터에 맨몸으로 뛰어든 꼴이다.

창업 준비는 '얼마나 오래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알차게 했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만, 이미 나는 전쟁터에 서 있었다.



2. 너무 모르는 사업분야를 선택했다


창업분야에 대한 무지는 필연적으로 '시행착오의 반복'을 가져온다.

'여론 컨텐츠를 기반으로 한 대중적 커뮤니티 사이트'를 구축하고자 하는 사업아이템에서, '여론'이라는 컨셉은 익숙하였지만, 이를 온라인상에서 상품으로 개발하고 판매해서 수익을 내기 위한 방법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이론적으로 달달 외우던 전술지식만 믿고 뛰어들었는데, 미처 지형지물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이리 빠지고 저리 넘어지면서 한동안 몸소 '지형지물'을 익혀야 했다.



3. 최선이 안 되었을 때를 대비하지 못했다


창업자가 갖추어야 할 많은 덕목 가운데,
'다양한 사고력'과 '용기 있는 결단력' 또한 필수항목이다.


나는 '낙관적인 사고력'만 가지고서 '최선의 방법이 안 되었을 때' 그 다음의 대안을 미리 만들지 못했다. '인정과 집념'만 가지고 있어서 '끝내고 멈춰야 할 시점'에서 브레이크를 밟지 못했다.

그것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헤어 나오지 못할 상황에 빠져서야 '백기'를 올리고 말았다.



4. 싸울 채비를 하고 나니까 이미 ‘패장’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무기를 채비하고 지형지물을 익히면서 비로소
강인해질 수 있었지만, 나는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시간과 자본과 인력이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싸울 채비를 다 갖추고 난 후의 내 모습은 이미 '패장'이 되어 있었다.




<산업환경측면>


1. 창업 시점이 동종업계의 ‘위기’가 시작되던 때


내가 창업하기로 마음먹었던 2000년도는 '아이러브스쿨'이 벤처신화를
이어가던 때였다.

화려한 꿈을 안고 뛰어들었지만, 이미 동종업계에서는 위기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길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 너무 의지하며 시작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위기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했기에 훗날 극복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2. 수익 창출이 어려운 분야에서 창업


위기에 처한 인터넷 기업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수익모델’ 창출을
요구받으며 진퇴를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수익모델 만들기’가 매우 어려운 분야를
아이템으로 선정했다.

그것은 단기간에 가시적으로 보여주기 어려운 것이었고, 장기투자가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상황이었지만, 나는 자금의 안정적인 준비도 없이
창업에 뛰어들었다.


3. 벤처에 대한 투자열풍이 식어가는 때


정부의 벤처 지원정책에 힘입어 많은 자본이 투자되었으나 거품 논란이
빚어지면서 자금유치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특히 인터넷기업에서
심하게 나타났다.


벤처기업의 거품이 빠지는 과정이라며 조만간 회복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장기간에 걸쳐 회복되지 않았다.

건실한 벤처기업, 인터넷 기업들도 이 시기에 많은 피해를 입었다.



<자원(인적/물적) 및 역량 측면>



1. 인적 네트워크 없이 ‘나홀로’ 창업


나는 인터넷 비즈니스를 경험해보지 못했고 개발자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적구성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럴 경우 경험이 풍부한 파트너와 어려움을 나누며 함께 꾸려갔어야
하는데 주변에 그럴 사람이 적었다.


그러다보니 사람 선택에 있어서 시행착오도 겪어야 했고, 쉽게 올 수도
있었던 길을 너무 멀리 돌아서 왔다.

2. 관련 분야 전문가그룹과 관계 맺었어야

여론 컨텐츠는 매우 특수한 분야의 사업이다.

따라서 해당 전문가그룹과 커뮤니티를 형성해 도움을 주고 받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사이트 개발에만 집착한 나머지 이런 관계에 소홀하였다.



3. 안정적인 자금확보는 필수


이 사업의 실패원인은 창업자인 내 역량의 부족과 자금조달이 원활히 되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크다.

처음부터 1억5천만원이라는 돈을 놓고 시작하는 것과 그때그때 만들어 가면서 1억5천만원이 들어간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사업의 계획 자체부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금의 안정적인 확보는 사업의 성패를 크게 좌우한다.



4. 과도한 차입경영은 창업자의 가정마저 위협할 것


아무리 사업자금이 막혔다고 해도 나처럼 무리하게 끌어다 쓰면 최악의
경우 재기가 어렵게 된다.

차입경영을 하려면 미리 책임질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한계선을 그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창업자의 가정마저 심각하게 위협당할 우려가 크다.



<전략적 측면>



1. 초기상품화에 너무 오랜 시간 소요


먼저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돈을 분명하게 파악하여야 한다.

그리고 가장 자신있는 핵심역량을 초기 상품에 집중시켜 그 안에 개발을 끝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처럼 결국 빛도 못보고 주저앉게 된다.



2.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에 욕심냈다


하고 싶은 것이 많더라도 단계적으로 하나씩 올라서야 한다.

나는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보여주려고 했다. 플래쉬 애니메이션만평이 그랬고, 온라인리서치 사업이 그랬다.

사이트도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인력을 먼저 채용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3. 독자 개발에만 집착해서 제휴-마케팅에 소홀했다


모든 기술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창의적인 컨셉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리 하였지만, 지나치게 독자적인 사고를 하다보니 더 큰 것들을 볼 수가 없었다.

관련 사업분야와 사이트를 찾아 개발 전부터라도 제휴를 맺어나가고, 활발하게 회사의 입지를 확대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매일 실시하던 온라인 여론조사를 다른 사이트와 공동으로 실시해 나갔더라면 더 많은 표본으로 신뢰도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혼자서 움켜쥐고 해결하려 했던 것도 옴부즈닷컴이 벽을 넘지 못했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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