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의 후손들
아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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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4 11:50
성종의 11번째 아들은 전성군입니다. 16세에 요절하여 큰 기록은 없습니다. 다음은 성종의 아들들입니다. 참고하세요.
계성군파(성종대왕 2남) 약사 |
계성군은 성종대왕의 2남이며 연산군의 아우이다. 숙의(淑儀) 하씨 소생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였으나 26세로 조졸하여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군(桂林君) 유(瑠)를 계자로 삼았다. 계림군은 연양군(延陽君) 등 5남을 낳았고 거기에서 손자가 10여 명을 두어 후손들이 퍼져나갔다. 계성군 후손 중에는 남규(南圭 : 1765∼1837) 남익(南翼 : 1771∼1835) 형제가 문과 급제자이다. 그러나 무과 급제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무림군파, 덕흥대원군파와 더불어 우리 문중의 3대 무관 집안이라 할 수 있다. 무관중에는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여 문무공신에 완춘군(完春君)에 봉해진 수량(遂 良 : 1673∼1735)과 흥선대원군의 파락호시절에 빰을 때린 일화로 유명한 장렴(章濂 : 1821∼1873) 형조판서, 그의 아버지 포도대장을 지낸 무관이면서 명필인 남식(南軾 : 1803∼1878) 등 제제다사(濟濟多士)하다. |
안양군(安陽君)은 1480년(성종 11) 음력 2월 19일 성종대왕의 3남으로 태어나서 1504년(연산군 10)에 별세하였다.
휘는 항(쐪), 자는 성의(聖儀), 호는 만송(晩松), 시호는 공회(恭懷).
어머니는 귀인 초계정씨이다. 초계정씨는 봉안군(鳳安君) · 정혜옹주(靜惠翁主) 등 3남매를
두었는데 안양군은 이 중 장남이다.
배위는 면천군부인(沔川郡夫人) 능성구씨로 정국공신(靖國功臣) 판서 능천군 수영(壽永)의 딸인데 1480년(성종 11)에 태어나 1556년(명종 11)에 별세하였다.
휘는 항(쐪), 자는 성의(聖儀), 호는 만송(晩松), 시호는 공회(恭懷).
어머니는 귀인 초계정씨이다. 초계정씨는 봉안군(鳳安君) · 정혜옹주(靜惠翁主) 등 3남매를
두었는데 안양군은 이 중 장남이다.
배위는 면천군부인(沔川郡夫人) 능성구씨로 정국공신(靖國功臣) 판서 능천군 수영(壽永)의 딸인데 1480년(성종 11)에 태어나 1556년(명종 11)에 별세하였다.
완원군은 1480년(성종 11)에 성종대왕의 4남으로 태어나 1509년(중종 4)에 별세하였다. 공은
숙의(淑儀) 남양홍씨(1457∼1510)가 낳은 7왕자 3옹주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이 때 성종대왕은 보수(寶壽) 24세(재위 11년)였고, 숙의 홍씨 또한 춘추 24세였는데 입궁 10년 8개월만에 공을 낳았다.
숙의(淑儀) 남양홍씨(1457∼1510)가 낳은 7왕자 3옹주 중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이 때 성종대왕은 보수(寶壽) 24세(재위 11년)였고, 숙의 홍씨 또한 춘추 24세였는데 입궁 10년 8개월만에 공을 낳았다.
회산군 염(恬)은 성종대왕의 5남으로서, 회산군파는 현 종손 형구에 이르기까지 15대를 내려오고 있다. 공은 10여 세가 되어 부왕의 뜻과 의도하는 마음을 잘 헤아려 조심불변(操心不變)하고 산회지청직(山檜之靑直)하라는 뜻에서 회산군(檜山君)으로 특봉(特封)되었다.
봉안군은 성종대왕 6남으로 어머니 초계정씨는 2남 1녀를 두니 장남은 안양군이고, 차남은 봉안군이다.
봉안군은 외아들 흥원군(興原君)을 두었으나 아들이 없어 성종대왕 8남인 익양군 손자 기성군(箕城君)을 계자로 삼았다. 견성군은 1482년(성종 13) 성종대왕의 7남으로 태어나 2명의 아들과 손자 3명 그리고 증손자 10명을 두었다.
9세에 군(君)에 봉해졌으며 여러 왕자들 중에서 가장 덕망이 있었다. 1507년(중종 2)에 남곤 · 심정 등의 무고로 강원도 간성으로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22일 적소에서 사사되었다. 그 후 1519년(중종 14) 조광조 · 김정 · 박상 · 이홍간 등이 공의 억울함을 상소하자, 임금이 즉시 후회하고 예전의 품계로 복작시키고 경민(景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익양군(益陽君)은 1488년(성종 19) 7월 1일 탄생하여 1552년(명종 7) 1월 21일 별세하였다.
공의 휘는 회(懷)요, 자(字)는 순지(順之), 시호는 순평(順平)이다. 성종대왕의 8남이며 어머니는 숙의홍씨(淑儀洪氏)이다. 1496년(연산군 2)에 익양군에 책봉되었고 중종 반정 때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됐고 1510년(중종 5)에 모친상을 당하자 3년동안 산소에 여막(廬幕)을 짓고 집상(執喪)의 예절(禮節)을 다하였다. 복(服)을 벗자 복직(復職)해서 도총관(都摠官)을 거쳐 문소전 · 연은전 · 종부시 · 사옹원도제조와 종친부의 유사당상관을 지냈다. 자손은 6남 3녀로 제일 번창하여 나라 혼인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공의 내외에게 명하여 예(禮)를 주관(主觀)하게 했다.
경명군은 성종대왕의 10남이고, 어머니는 숙의 남양홍씨로서 집현전 제학 일동(逸童)의 딸이다. 공은 숙의의 7남 중 다섯째이다. 경명군파는 현 종손 택구에 이르기까지 16세, 500년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무산군은 성종대왕의 12남으로 1490년(성종 21)에 태어나 1525년(중종 20)에 별세하였다. 연산군 때에 안동 춘양에 피신하여 음요학정의 위기를 모면하였고, 문필 문장이 뛰어났으며 36세에 별세한 후 효정(孝貞)이란 시호를 받았다. 슬하에 8남 4녀를 두어 4녀는 명문가에 출가하고 8남 중에서 영안정(永安正) · 부안군(扶安君) · 영원군(永原君) 3남만이 후손을 두어 5개 파가 현존한다.
영산군은 4명의 아들과 15명의 손자와 37명의 증손을 두었으니, 후손이 매우 번창하였다. 그 가운데에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간 후손도 많다. 기록을 보면, 경기도 안양 · 양주 · 남양주 · 강화 · 장단, 충청도 청주, 경상도 상주 고성 · 거제, 전라도 고창 등지로 내려가 살게 되었다.
운천군은 조선왕조의 중흥을 이룩한 성종대왕의 14남으로서 휘는 인(썎), 시호는 소회(昭懷)이다. 운천군은 숙의(淑儀) 홍씨(洪氏) 소생의 7왕자 완원군(完原君) · 회산군(檜山君) · 견성군(甄城君) · 익양군(益陽君) · 경명군(景明君) · 운천군(雲川君) · 양원군(楊原君)과 3옹주 혜숙(惠淑) · 정순(靜順) · 정숙(靜淑) 중의 6남이다.
양원군은 성종대왕의 15남이며 숙의 남양홍씨의 소생이다. 양원군파는 용(庸)자 항렬 까지 21세를 내려오고 있다. 착하고 어질게 살았던 선조의 정신을 이어받아 법도를 지키고 행실을 바르게 하고 충(忠)과 효(孝)를 기본으로 윤리도덕을 지키면서 510여 년을 이어내려 왔다. 항상 예(禮)를 지키며 덕(德)을 쌓아 가문이 화목하고 자손이 번성하였다. 양원군의 장자 함녕군 수선(壽璿)의 묘소를 의정부시 녹양동 숙의 남양홍씨 묘역 서쪽에 모시면서 후손들의 선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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